길을 걷다 보면 우연히 마주치는 설치물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궁금했다.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 작품들의 가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설치물을 좋아하고 잘 사용하고 있다면 의미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색해진다. 아주 오래전부터 현재까지 공공미술의 역할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도시들을 살펴봤다.
▒ 에디터 박진명 / 사진 자료실
Chicago / U.S.A
문화 예술 도시 브랜딩의 성공 사례
재즈의 도시이자 바람의 도시이며 건축의 도시, 문화의 도시인 시카고. 여러 수식어가 증명하듯 도심 어디서든 문화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 도시 곳곳에는 수많은 예술품과 조형물이 관광객을 사로잡지만, 특히 시카고의 공공미술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밀레니엄 파크를 찾는 것을 추천한다. 밀레니엄 파크는 건축과 문화 예술이 잘 어우러진 시카고 최고의 복합 문화 예술 공간이다. 1997년 당시 시카고 시장이었던 리처드 데일리(Richard M. Daley)가 밀레니엄 2000년에 맞춰 완공할 계획이었으나 공사가 지연되면서 2004년에 완성되었다. 애초에 이 공원 프로젝트의 취지는 도심 중심에 문화 예술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도시의 이미지를 새로이 만들고자 한 것. 시카고의 전통 문화인 재즈와 블루스 음악을 고취시키고 예술도시라는 도시 브랜드를 확립하고자 했다. 건축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프랭크 게리(Frank Gehry)와 캐서린 구스타프슨(Kathryn Gustafson)이 맡았으며 공공미술은 공개적으로 공모를 받아 당시 최고의 미술가인 제프 쿤스(Jeff Koons)와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가 선정되었다. 가장 유명한 ‘클라우드 게이트(Cloud Gate)’는 영국이 낳은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으로, 제작 기간만 3 년에 걸쳐 만들어진 대형 조각 작품이다. 클라우드 게이트는 도심의 건축물과 예술 작품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뤘다는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또, 마치 거대한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매끄러운 슈퍼미러로 처리했다. 이는 대형 볼록거울처럼 시카고의 푸른 하늘과 멋진 스카이라인을 반사적으로 보여 주며 색다른 이미지를 형성했다. 이 외에도 밀레니엄 파크에는 갤러리에서 운영하는 전시 공간도 있어 1년에 분기별로 매번 새로운 전시회도 경험할 수 있다. 밀레니엄 파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야외 공연장인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은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했다. 리본 장식의 모양에서 모티프를 얻어 세련되고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사랑받고 있다. 공연장 앞에는 4000여 석의 좌석이 있고 잔디 광장에는 약 7000여 명 정도가 피크닉을 즐기며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규모를 갖췄다. 이곳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시카고 재즈 페스티벌, 그랜드 파크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등 봄부터 가을까지 야외 공연이 끊이지 않는다. 이 외에도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공공 미술가인 하우메 플렌자(Jaume Plensa)가 디자인한 거대한 분수 형태의 환경 조형물, ‘크라운 파운틴’도 빼놓을 수 없다. 내부에 내장된 LED 스크린을 통해 시민 1000여 명의 얼굴 표정이 등장한 것이 특징. 이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시카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London / United Kingdom
영웅 대신 현대 미술품
런던을 여행할 때 가장 많이 가는 곳은 단연 트라팔가 광장이다. 광장을 거쳐야만 목적지로 향할 수 있는 이유도 있지만, 트라팔가 광장의 분위기를 느끼기 위함도 있다.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갑자기 나타나는 넓은 공간, 광장을 지키는 아름다운 조각상, 그 공간을 메우는 사람들의 소리, 버스킹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거리의 예술가들이 있다. 트라팔가 광장은 늘 이런 모습이다. 유럽의 광장에서는 동상이나 조각 작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미술품들이 특별한 이유는 ‘네 번째 좌대 프로젝트’ 때문이다. 네 번째 좌대 프로젝트란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4개의 동상 중 예산이 부족해 세우지 못했던 윌리엄 4세의 기마상 대신 현대 미술품을 전시하는 프로젝트다. 위원회가 6개의 후보작을 선정해 3개월간 대중에게 홍보한 뒤 공개 투표, 전문가 심사 등을 거쳐 최종 작품을 선정한다. 이렇게 선정된 작품은 약 2년간 네 번째 좌대에 전시된다. 으레 왕의 기마상이나 영웅의 조각품을 세워 나라의 위대함을 알리는 위치에 현대 미술품을 전시하면서 시대에 맞는 예술품으로 대중과 소통한다는 것이 의미 있다. 1999년에 세워진 네 번째 좌대 프로젝트의 첫 작품은 마크 월링거의 ‘에케 호모’다. ‘에케 호모’란 ‘이 자를 보라’라는 뜻으로, 성경에 나오는 예수 수난의 한 장면을 상징한다. 군중들 앞에서 비난을 받는 예수의 비참함 과 고통이 극대화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마크 월링거는 “예수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지도자였고, 나는 그를 평범한 인간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하며 그가 이 거대한 제국주의적 상징들 앞에 권위와 이념을 벗어 던진 인간을 세움으로써 이 프로젝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이후 2005년엔 마크 퀸의 ‘임신한 앨리슨 래퍼’에서 장애인이자 임신한 여성의 모습을 세워 지금의 영국을 살아내는 일반 소시민들의 존재에 대해 되돌아보게 했으며, 2018년에 전시한 마이클 라코비츠의 작품 ‘보이지 않는 적은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는 2017년 발생한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IS의 유물 파괴 사건을 모티프로 우상숭배와 IS 테러, 시리아 내전으로 발생한 난민 문제를 환기하는 예술품을 탄생시켰다.
Stockholm / Sweden
지하 세계의 아름다움
스웨덴은 공공미술의 선진국으로 손꼽히는 나라로, 정부와 예술단체, 대중이 힘을 모아 거리와 공원을 꾸미거나 문화 향유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일상이다. 국가 정책으로도 아낌없이 지원을 펼치는데, 이렇게 마련된 제도가 스톡홀름의 1퍼센트법이다. 무려 1963년 스톡홀름 시의회가 처음 실행한 제도로, 전체 건축 비용의 1%를 일반 대중이 누릴 수 있는 공공미술 작품 제작과 설치에 할애하도록 규정한 법안이다. 스톡홀름의 경우 의무적으로 적용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목표를 우선으로 한다. ‘모든 사람이 주변 환경 속에서 예술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한다’. 이처럼 미적 환경에 투자하도록 법안으로 제정되어 있는 스톡홀름 공공미술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지하철역이다. 이는 총 100km의 길이에 달하는 스톡홀름 지하철이 ‘세상에서 가장 긴 갤러리’라는 수식어로 불리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지하철 첫 개통을 앞둔 1950년, 지역 예술가들이 차갑고 투박한 지하에 예술을 입히는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그것이 시작점이 되어 현재까지도 다양한 역에 시대별로 가장 트렌디한 미술과 디자인, 건축 기법 등을 새기고 있다.
1950년대에는 콘크리트에 타일을 붙이는 ‘욕실 건축’이, 1970년대에는 당시 스웨덴의 농촌 인구 감소와 삼림 벌채, 노동에 대한 이야기 등 시대적, 사회적 메시지를 담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지역적인 특징을 기반으로 예술가들의 개성을 입힌 디자인이 유행했다. 현재는 스톡홀름 지하철역 100여 개 중 90개 이상의 역에는 디자이너와 건축가,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150여 명이 참여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미국 CNN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하철역’에 이름을 올린 T-센트랄렌 역부터 우주와 기술 발전을 상징하는 4가지 요소를 주제로 주변에 위치한 왕립기술연 구원의 철학을 표현한 테크니스카 획스콜란(Tekniska Hőgskolan)역까지 다양한 회화, 모자이크, 조각, 설치 미술 등으로 역사의 한 장면이 되고,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고 있다.
Copenhagen / Denmark
지역 재생의 새로운 신호탄
예술하면 빼놓을 수 없는 나라인 덴마크에도 공공미술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덴마크인들은 척박한 지형과 변덕스러운 기후 조건 속에서 그들만의 예술과 디자인을 뿌리내려왔다. 폴 헤닝센, 아르네 야콥센, 한스 베그너 등 위대한 디자이너들의 도시, 코펜하겐에 자리한 뇌레브로 지역은 슈퍼킬렌 공원(Superkilen Park)이 조성되며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뇌레브로 지역은 코펜하겐에서도 유명한 우범지대로, 조폭 세력 간의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60개국 이상에서 모인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밀집해 거주하는 동네로, 코펜하겐의 다문화를 상징하는 지역이기도 하지만 주민들 간의 세력 싸움이 치열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민을 결속해줄 커뮤니티 강화가 필요한 곳이었다. 이 지역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건축가와 예술 집단 등이 합심했다. 덴마크 대표 예술가 그룹 ‘슈퍼플렉스’와 젊은 건축가 비아르케 잉엘스가 이끄는 건축사무소 ‘빅’, 그리고 독일 조경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는 조경 설계 사무소 ‘토포텍’이 힘을 모았다. 뇌레브로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슈퍼킬렌 공원은 덴마크의 상징인 수많은 자전거도로를 연상시 키는 메인 광장을 중심으로 덴마크 특유의 군더더기 없지만 세련된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이 공원은 사람들에게 야외 활동을 권유하고 밖에서 머무르는 시간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놀이시설부터 체스판이나 탁구대, 그네 등을 모티프로 한 다양한 디자인 조형물을 조성해 가족 단위의 주민들도 함께 시간을 보내기에 제격이다. 마침내 이곳의 탁 트인 광장이 스케이트보더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며 젊은 이들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고 이제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을 만큼 역동적이고 생기 넘치는 지역이 되었다. 슈퍼킬렌 공원이 범죄 근절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진 못하겠지만, 공공디자인을 통해 우범지대로 치부되던 동네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점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