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다 더 아름다운 로케이션

영화 속, 장면 장면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아름다운 장소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 Karlovy Vary, Czech

▒당신의 핑크는 어떤 색입니까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어쩐지 여리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며 천박하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는 핑크색 하나로 극을 이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각기 다른 핑크색을 닮았다. 우리가 보는 이들만의 세계를 핑크색으로 지정하고 채도를 높이고 낮추며 핑크로 다양한 색감을 연출해 각양각색의 인간상을 표현했다. 특이하고 화려한 연출로 어른들의 잔혹 동화라고 불리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촬영지는 체코 카를로비바리. 수도인 프라하에서 서쪽으로 120km 떨어진 독일 국경과 맞닿은 곳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카를로비바리를 보고 영화의 색감에 대한 영감을 얻었고, 예상대로 영화 촬영은 주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호텔이라는 제한적인 공간이 배경이 되는 영화지만 디테일만큼은 다르다. 1930년대 유럽 분위기를 담기 위해 호텔 창밖은 옛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된 독일 작센주 괴를리츠에서, 호텔 내부 장면은 괴를리츠 백화점에서 촬영했다.
카를로비바리는 온천 도시로도 유명하다. 14세기 중반, 카를 4세가 이곳을 방문해 보헤미아 숲에서 사냥을 하던 중 다친 사슴이 온천 물로 들어가 치유되는 모습을 본 뒤로 온천의 효능이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곳은 영화 장면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눈길을 끈다. 감독은 특히 브리스톨 팰리스와 그랜드 호텔 풉푸에서 영화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생각해냈다고 한다. 브리스톨 팰리스는 19세기 귀족의 저택처럼 웅장함과 고결함이 느껴지는 4성급 호텔이다. 그랜드 호텔 풉푸는 영화 <007 카지노 로얄>의 배경이기도 했다. 또한 이 작은 도시는 매년 7월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1946년 그 유서 깊은 역사를 시작한 카를로비바리 국제 영화제는 유럽의 주요 영화 행사 중 하나로 꼽힌다.

<윤희에게> 2019 Otaru, Japan

▒눈 속에 꽁꽁 숨긴 과거와 마주하는 설원 마을

엄마 윤희에게 도착한 한 장의 편지로 영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새하얀 오타루의 눈을 타고 세 가지 관계의 타래를 풀어간다. 엄마 윤희와 딸 새봄, 편지 수신인인 쥰과 그 편지를 보낸 고모 마사코, 그리고 동성의 사랑이 죄가 되던 시절, 사랑으로 인해 가슴 깊은 상처를 얻은 윤희와 쥰. 네 여성의 연대가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영화는 보여준다. <윤희에게>의 감독 임대형은 한 인터뷰에서 일본 오타루 여행 중에 만난 동네 할머니가 “눈이 언제 그칠까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그곳을 배경으로 삼았다고 이야기했다. 늘 눈이 많이 오는 동네의 토박이 할머니에게서 들은 그 말이 어쩐지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고, 뭔지 모르는 막막한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고. 그렇게 오타루의 눈을 타고 그동안 한국에는 없었던 중년 여성의 퀴어 서사는 성공적으로 탄생했다.
오타루는 훗카이도 삿포로 바로 옆에 있는 도시다. 영화 <러브레터>에서도 인상적인 설경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얀 설원에 아기자기한 낮은 건물들이 어우러진 풍경이 먹먹하고 아련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까. 삿포로에 비해 오타루는 옛날 훗카이도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어 훗카이도의 날것을 경험하기에 좋다. 그래서 삿포로를 방문한 여행자들은 오타루를 당일치기로 많이 찾는다. 오타루의 하이라이트는 해 질 무렵에 있다. 사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이 아름답지 않을 곳이 어디 있겠느냐만, 저녁에 보는 야경이 어쩐지 유럽의 작은 마을을 닮기도 했다. 또 오타루의 온천 마을도 빼놓을 수 없다. 조잔케이 온천은 따뜻한 온천과 눈의 조화가 아름다운 곳으로, 눈의 마을에서 펼쳐지는 온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2015 Kamakura, Japan

▒가장 보통의 일본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늘 그랬든 고레에다 히로카즈(이하 고레에다) 감독의 주 소재인 가족의 이야기다. 네 명의 자매가 비로소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여기에는 고레에다 감독만의 감성이 듬뿍 담겼다. 고루한 소재를 진부하지 않게 만든 영화는 보는 눈을 간지럽히는 영상미와 촬영지가 영화를 흥행하는 데에 한몫한 셈. 사실 영화의 주요 촬영지인 가마쿠라 지역과 에노섬은 일본의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다. 고레에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일본의 역사 유적이 많아 가장 ‘일본스러운’ 영상미를 담아낼 수 있고, 산과 바다도 가까워 여러모로 촬영하기 좋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또 영화에 사계절이 변하는 모습을 담고 싶었는데, 이 또한 잘 나타내기 좋은 곳이라고도 덧붙였다.
가마쿠라는 한적하고 소박한 바닷가 마을이다. 도쿄에서는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타고 출발한 지 2시간쯤 지나야 도착하는 곳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나오는 네 자매의 성품처럼 동네 풍경 역시 차분하고 따뜻하며 침착하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잔멸치덮밥은 봄이 제철이고, 좀 더 지나 여름 직전에는 전갱이튀김이 맛있다. 영화 후반부에 첫째 사치와 막내 스즈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기누바리산 정상은 유일하게 유명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길이 잘 닦여 있지 않아 땀을 한 바가지 쏟아내야 정상에 이른다. 힘겹게 오른 정상처럼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갈등과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함께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숨 돌리고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탁 트인 전망처럼 비로소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고, 이 동네 자체가 영화의 메시지를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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